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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서울을 수십 번 다녀봤다고 자신했는데, 시청역에서 출발하는 정동길 코스를 걷고 나서야 제가 서울의 절반도 몰랐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세실마루 옥상에서 내려다본 성공회 성당의 주황빛 지붕, 을사늑약이 체결됐던 중명전의 무거운 공기, 빌딩 숲 한가운데 조용히 앉아 있는 경희궁의 평화로움. 입장료 한 푼 없이 이 모든 걸 하루에 걸을 수 있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습니다.
세실마루와 정동전망대: 같은 하늘, 다른 시선
저도 처음엔 "옥상 전망대가 뭐 얼마나 다르겠어"라는 생각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세실마루 전용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 그 생각은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시청역 3번 출구에서 걸어서 5분도 안 걸리는 거리에 이런 공간이 숨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세실마루는 1970~80년대 한국 소극장 문화를 대표했던 세실극장의 옥상정원입니다. 한때 폐관 위기까지 갔던 이 공간은 현재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미래유산이란, 서울시가 근현대 문화유산 중 미래 세대에 전달할 가치가 있다고 인정한 비지정 유산을 뜻합니다. 단순한 '오래된 건물'이 아니라 도시의 기억을 담은 공간이라는 의미이지요(출처: 서울시 미래유산).
옥상에 올라서면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이 정면에 펼쳐집니다. 로마네스크 양식이란, 두꺼운 벽과 반원형 아치를 특징으로 하는 중세 유럽의 건축 양식인데, 이 성당은 한국 전통 기와지붕을 그 위에 얹어 동서양이 묘하게 공존하는 독특한 외관을 완성하고 있습니다. 제 경험상 이 풍경은 어떤 해외 여행지와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습니다.
세실마루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있는 정동전망대도 함께 들를 것을 권합니다. 서소문청사 13층에 자리한 이 전망대는 2025년 5월에 리모델링을 마쳤는데, 통유리창 너머로 덕수궁 돌담길과 서울 도심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세실마루가 '골목 안 비밀 공간' 같은 느낌이라면, 정동전망대는 탁 트인 파노라마 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둘은 성격이 완전히 다릅니다. 어느 쪽이 더 낫다기보다, 두 군데 모두 걷는 것이 정답입니다.
- 세실마루 운영시간: 오전 9시~오후 9시, 매주 월요일 휴무 (입장 무료)
- 정동전망대 운영시간: 평일 오후 1시 30분~, 주말 오전 9시~, 법정 공휴일·성탄절 휴무
-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내부 개방: 오전 11시~오후 4시 (성당 사정에 따라 변동 가능)
- 일몰 시간대 세실마루 방문 시 덕수궁과 성당이 황금빛으로 물드는 인생 사진 촬영 가능
중명전·경교장·경희궁: 걷는 역사유산의 무게
여행지를 역사유산 중심으로 골랐을 때 "무겁고 지루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오히려 반대였습니다. 중명전에 들어서는 순간, 이 공간이 단순한 전시관이 아니라는 걸 몸으로 느꼈습니다. 실내화로 갈아 신고 조심스럽게 발을 들이는 그 행위 자체가 이미 역사 앞에 예의를 갖추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중명전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장소입니다. 을사늑약이란, 일본이 군사력을 동원한 협박 하에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강압적 조약으로, 고종 황제의 최종 승인 없이 체결되어 국제법적으로도 효력이 없다는 것이 학계의 지배적 견해입니다(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전시된 을사늑약 현장 재현물 앞에서 제가 느낀 감정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분노에 가까웠습니다.
경교장은 백범 김구 선생이 서거한 장소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입니다. 제 경험상 이곳에서 가장 오래 머물게 되는 공간은 2층 집무실입니다. 창가의 작은 책상, 그 앞에 놓인 유묵(遺墨), 그리고 선생이 그 자리에서 안두희의 총탄에 서거했다는 안내문. 유묵이란 고인이 남긴 글씨나 그림을 뜻하는데, 이 경우 서거 당시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두루마리 중 하나입니다. 지하 1층에는 선생이 피격 당시 입고 있었던 피 묻은 저고리가 보관되어 있습니다. 전시를 다 보고 나오면서 제가 누리는 오늘 하루가 누군가의 희생으로 얻어진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경교장에서 도보 3분 거리에 있는 경희궁은 조선 시대 이궁(離宮)의 역할을 했던 궁궐입니다. 이궁이란 정궁(법궁)이 아닌 임금의 별도 거처용 궁궐을 의미합니다. 인조부터 철종까지 10대에 걸친 왕들이 머물렀지만, 일제 강점기에 건물 대부분이 철거되는 수난을 겪었습니다. 지금은 숭정전, 자정전, 태령전 세 정각이 복원되어 있는데, 복잡한 역사를 알고 걸으니 그냥 아름다운 궁궐로만 보이지 않았습니다. 학문을 좋아했던 영조가 법궁보다 이곳을 더 자주 찾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직접 걸어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숲길 안쪽에는 영렬천이라는 작은 샘터도 있고, 태령전 뒤 서암이라는 기이한 형상의 바위도 눈길을 끕니다.
- 중명전 관람시간: 오전 9시 30분~오후 5시 30분, 매주 월요일 휴무 (입장 무료)
- 경교장 관람시간: 오전 9시~오후 6시, 공휴일 제외 매주 월요일 휴관 (입장 무료)
- 경희궁: 상시 개방, 내부 서울역사박물관과 연결 동선으로 함께 관람 가능
- 세 곳 모두 시청역에서 도보권 이내, 지하철 접근성 최상
정동길을 한 바퀴 다 걷고 나서야 이 코스가 단순한 무료 여행지 목록이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세실마루에서 유럽 같다며 감탄하고, 중명전에서 울컥하고, 경희궁 느티나무 고목 앞에서 한숨 돌리는 이 감정의 흐름 자체가 여행이었습니다. 같은 코스를 두고 "역사 공부는 좀 지루하지 않냐"라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역사유산들이 없었다면 정동길이 이렇게까지 특별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청역에서 출발해 약 2km. 입장료 없음. 지하철 접근성 완벽. 사람 많은 관광 코스 대신 조용하고 묵직한 하루를 원한다면, 주말 아침 일찍 시청역 2번이나 3번 출구로 나가 보시길 권합니다. 저도 이른 봄에 다시 한번 걷고 싶습니다.